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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책과 영화

십자군 이야기 1권 中 흥미로운 구절들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저, 송태욱 역, 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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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책 내용 중 흥미로운 구절을 바탕으로 후속 포스팅을 위한 자료입니다.

본 포스팅에 언급된 모든 구절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출판사인 '문학동네'와 저자 및 역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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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그 땅으로 가서 이교도와 싸워라. 설사 그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너희의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될 것이다. 신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나는 여기서 그것을 분명히 약속한다."

(중략)

 연설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감동했다. 군중 사이에서 자연스레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라는 함성이 터져나왔고, 그 커다란 함성 속에서 한 사람이 막 연설을 끝낸 교황 앞으로 나아갔다. (후략)

pp.24-25. 교황 우르바누스2세의 연설 장면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단지 그만두자고 주창하는 것만으로 중지된 적이 없다. 그러한 인간세계에서 군주들 사이의 휴전을 실현하려면, 지금 서방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는 힘과 에너지를 다른 데로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동방을 그 목표로 삼은 것은, 동방으로 향하면 같은 휴전이라도 '신(神)의'라는 말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당시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는 '대의'이자 '명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p. 27.



(전략) 이후 열흘 동안 공의회가 토의를 거쳐 결정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이었다.

1. 십자군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완전한 면죄가 주어진다.(중략)

2. 질병 등 불가피한 이유로 참가하기 힘든 자는 다른 사람의 참가에 필요한 비용, 즉 의복이나 무기를 구할 돈을 헌금할 것. (중략)

3. 동산과 부동산을 불문하고 참전자가 남기고 가는 자산은, 로마 교황이 보증하고 소속 교구의 사제가 직접 책임지고 감시해서, 그가 귀국할 때까지 보전한다. (중략)

4. 십자군 참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산을 팔아야 하는 경우, 또는 그 자산을 담보로 빚을 내는 경우는, 정당한 값을 받을 수 있도록 교황이 보증하고 주교와 사제가 책임지고 감시한다.

5. 십자군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자는 먼저 자기가 속한 교구의 사제에게 신청하고 허가를 받은 후, 십자가에 서약하고 나서야 출발할 수 있다. (중략)

6. 십자가에 서약한 후에도 출발하지 않거나, 혹은 출발했어도 도중에 일찌감치 돌아와버리는 자는 곧바로 파문에 처한다.

pp. 31-32.



 가장 먼저 유럽을 떠나 동방으로 향한 것은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빈민들로 구성된 십자군이었다. (중략) 그중 대부분은 농민이나 도시의 하층민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도둑 등 범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있었다. 대부분은 제대로 된 무기조차 들지 않았고 군장을 갖춘 사람은 극히 소수였는데, 그들도 당시 떠돌이 기사라 불리던, 일본으로 말하자면 '낭인'이었다.

pp.35-36.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에 대한 묘사



 그런데 맨 처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기다운 무기도 없이 군장은커녕 누더기를 몸에 걸친 대집단이었다. (중략)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나 어린아이까지 포함된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여름이니 잠만 잘 수 있으면 충분하다 해도, 거처까지 요구해온 것이다.

p. 60. 십자군을 기다리는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입장에서 본 민중 십자군의 모습



 그때까지 대부분의 이슬람교도는 십자군을 영토 획득이 목적인 침략군이라 믿고 있었다. 꽤 먼 곳에서 온 침략자들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십자군 중에는 예루살렘 해방보다 영토 획득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도 있었으므로, 이슬람측의 판단이 백 퍼센트 오해였다고는 할 수 없다.

p. 110. 십자군 초기 이슬람교도가 생각한 십자군의 목적.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황제를 눈 속에 세워둠으로써 로마 교황의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 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을 이슬람과의 전쟁에 내보냄으로써 로마 교황의 권위를 과시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 하인리히를 상대로 한 권력투쟁에서 20년 만에 승리한 것이다.

p. 117. 전임 교황이 일으킨 '카노사의 굴욕' 사건으로 교황에 대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적대심이 극에 달했을 때, 후임 교황인 우르바누스 2세가 취한 교황권 강화책이 '십자군 전쟁' 제안이라는 효과적인 우회책이었음을 설명하는 구절.



 십자군은 프랑스의 유력한 수도원이던 클뤼니 수도원이 불을 붙이면서 시작된, 말하자면 종교가 주도한 '사회개혁운동'이었다.

p. 119.



 하지만 툴루즈 백작 레몽은 '성스러운 창'을 계속 보관한다. 그러나 6년 뒤 그가 죽은 후 이 '성스러운 창'은 기묘하게도 네 개로 늘어난다. 이 네 개의 '성스러운 창'의 행방은 이런 성유물의 운명을 무척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중 하나는 지금도 아르메니아의 교회에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팔레스티나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 전해진다.

 두번째는 제7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팔레스티나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오랫동안 파리의 교회에 보존되다가 프랑스 혁명의 혼란중에 사라졌다.

 세번째는 15세기 말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이 당시 교황에게 보냈다는 것으로, 지금도 바티칸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데 아직 직접 본 사람은 없다.

 마지막은 지금도 빈에 보존되어 있고 유일하게 인터넷상에서 사진과 설명을 찾아볼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옛날에는 신성로마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유물로 소중하게 보존되던 것이다.

p.211. 1차 십자군 전쟁 중에 발견되었다고 알려진 로마 병사가 예수를 찌른 것으로 전해지는 '성스러운 창'에 대한 설명.



 오리엔트 사람들은 서양의 중무장한 기사단을 본 적이 없었다. 십자군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중무장한 무리다. 게다가 중세유럽의 투구는 기사의 얼굴을 완전히 가린다. 즉 사람보다 기계에 가까운 섬뜩함을 풍겼던 것이다.

p.216. 십자군 전쟁 당시 중무장한 기사단이 오리엔트 지방에 처음 나타난 장면을 묘사하며.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p.239.



 아랍인이나 투르크인은 원래 유목민이었던 탓인지 전장에도 모든 재산을 가져가는 습관이 있었다. (중략) 그래서 이슬람교도 군대와 싸워 이긴다는 것은 군사력을 패배시키는 것뿐 아니라 한몫 단단히 챙기는 일이기도 했다. (후략)

p. 249.



 두 명의 비범한 지휘관보다 한 명의 평범한 지휘관을 택하겠다고 한 것은 나폴레옹이지만, 지휘계통의 일원화는 가지고 있는 힘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p. 251.



 기록자든 연대기 작가든, 항상 화제를 제공해주는 사람의 언행에 주목하는 성향은 오늘날의 저널리스트와 전혀 다르지 않다.

p.252.



 트리폴리는 설탕 산지로 유명한데, 십자군 시대에 이 땅에서 생산되는 설탕이 서유럽으로 전해졌다. 유럽인의 단맛이 고대 로마 시대의 벌꿀에서 설탕으로 바뀐 것도 십자군 원정의 영향 중 하나다.

p. 259.



 황제도 왕도 참전하지 않은 제1차 십자군의 주역들은 유럽 각지에 영지를 가진 제후들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아니 자주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분열을 반복했지만, 최종 목표 앞에서는 언제나 단결했다.

 이 점이 이기적이고 분열을 반복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떤 이슬람측 영주들과의 차이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1차 십자군이 성공한 주된 요인이었다.

p.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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