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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전시회/문화재/문화재 답사

고종의 '덕혜 옹주' 사랑이 깃든 곳 : 덕수궁 준명당

 덕수궁(경운궁)은 대한 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쓸쓸한 만년을 보낸 궁궐로 기억되고 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기고 왕위조차 강제로 물려준 채로, 힘없는 나날을 보내던 고종에게 뒤늦게 낛이 하나 생겼다면, 바로 '덕혜옹주'의 탄생일 것이다.



 다음은 실록에 나오는 '덕혜옹주' 관련 기록이다.

「덕수궁(德壽宮) 궁인(宮人) 양씨(梁氏)가 딸을 낳았다. 양씨에게 당호(堂號)를 내려 복녕(福寧) 이라 하였다.」
<순종실록 부록 3권, 5년(1912 임자년) 5월 25일(양력) 2번째기사>
 
「태왕 전하(太王殿下)복녕당(福寧堂)에 왕림하였다. 이희 공(李熹公) 이하 종척(宗戚)과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차관(次官) 칙임관(勅任官) 이상 및 내빈(內賓)을 인견(引見)하고 이어 사찬(賜饌)하였다. 새로 태어난 아지(阿只)가 삼칠일(三七日)이 되었기 때문이다.」
<순종실록 부록 3권, 5년(1912 임자년) 6월 14일(양력) 2번째기사>

「복녕당 아기(福寧堂阿只)에게 덕혜(德惠) 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순종실록 부록 12권, 14년(1921 신유년) 5월 4일(양력) 2번째기사>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이기에,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많이 닮은 딸이기에, 고종에게 있어서 덕혜옹주는 둘도 없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고종은 그렇게도 사랑하는 딸을 위해 덕수궁 '준명당'을 유치원으로 이용하여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해준다.

덕수궁(德壽宮)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여 복녕당(福寧堂) 아기씨(阿只氏)를 교육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와 장옥식(張玉植)을 보모(保姆)로 촉탁하였다.」
<순종실록 부록 7권, 9년(1916 병진년) 4월 1일(양력) 1번째기사>

태왕 전하준명당(浚明堂)에 임어(臨御)하여 유치원의 학도를 소견하고 필묵을 하사하였다.」
<순종실록 부록 7권, 9년(1916 병진년) 5월 8일(양력) 1번째기사>



 이렇게 고종에 의해서 덕혜옹주의 유치원이 된 준명당의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밝을 명(明)'자와는 다르게 '날 일(日)' 대신 '눈 목(目)'자가 들어가 있다. 이 글자는 '눈밝을 명'이라는 글자인데, 어두워지는 국운 속에서도 자식만큼은 밝은 눈을 가지고 현명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고종이 이 곳을 유치원으로 정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곳 준명당에 유치원을 설치할 당시에, 아이들이 놀다가 혹여 다칠까하여 건물 바깥쪽에 난간을 설치했다고 한다. 준명당의 돌난간 바깥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홈이 파여 있는데, 이 것이 당시 난간을 설치했던 흔적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딸이었지만 일본에 강제로 시집가는 것조차 막아주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했던 비운의 왕 '고종'

 그런 그의 안타까운 자식 사랑을 이 곳 준명당에서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