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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전시회/문화재/문화재 답사

답사의 매력 - 조선의 궁궐 이야기를 시작하며

 혼자서 조용하게 걸어다니며 여유로움 속에서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또 때로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사색에 잠기거나 달콤한 상상에 빠지는 즐거움.
 거기에 지식의 수준까지 저절로 깊어지게 만들어주는 이득까지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 매력에 사로잡힐만 하지 않은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서 몸과 마음을 쉬고 있으면 저절로 스트레스까지 해소되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답사는 나에게 있어서 청량제와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답사의 시간을 '내 영혼이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라의 큰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었던 창덕궁 인정전


 취직을 위해 서울로 영어 학원을 다니며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면 집이 있는 수원으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 학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다니곤 했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그냥 가버리면 무언가 아쉬운 일이 남아 있는 듯 했다.

 처음 한 두번은 전철비 아까워서라도 주변 구경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다녔는데, 청계천, 동대문, 종로 일대를 주로 돌아다니다 지칠 때쯤 되면 서점에 가서 좋아하는 책을 붙잡고 한참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어느 날 학원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경복궁에 들리게 되었는데, 학생 때 방학 숙제 때문에 형식적으로 찾아와서 기념 사진 찍고 안내판에 적힌 글 몇 개 베껴가던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러다 문득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서문에 있던 글이 생각났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지식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지라 스스로 책을 찾아디니고, 사고, 또 보며 그 속에 들어 있는 지식들을 자연스럽게 체득했기 때문일까. 예전에는 단순히 임금이 살았던 궁궐, 역사적인 유적, 조금 더 나아가 조상의 지혜가 담긴 건물로만 보였던 궁궐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제 각각의 건물들이 다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었고, 얼핏 같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특색을 갖춘 건물들이었다. 건물 하나 하나에 담긴 역사적 의미도 남다르게 다가왔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헛말이 아니었다.

경복궁 향원지와 건청궁. 뒤로 북악산이 보인다.


 혼자 돌아다니며 얻을 수 없는 지식은 안내원의 도움을 많이 얻었다. 일부로 안내하는 시간에 맞추어서 기다리고 있다 보니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외국인들, 특히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이 많이 찾아와서 우리의 궁궐을 보고 간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궁궐 안내소에 배치된 전문 안내원의 안내를 받기도 했고, 때로는 일행을 이끄는 여행 가이드의 안내를 받기도 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과연 저 가이드가 궁궐에 대해서 정확한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있을까'하는 작은 의문도 가져 보았다.

 궁궐 답사를 하면서 한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의외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안내원의 안내를 받는 사람이 작다는 사실이었다. 주말에는 워낙 사람이 많기에 안내를 받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많았지만, 그렇지 못한 평일의 경우에는 드나드는 사람은 많아도 안내를 받는 사람이 적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였다. 그러다보니 안내를 기다리고 있으면, 혼자서 안내를 받는 일도 많았고, 기껏해야 5~6명과 함께 안내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때로는 자료와 함께, 때로는 안내원과 함께 궁궐을 돌아보면서 살아있는 지식을 얻으며 궁궐 답사의 재미에 푹 빠져 지내게 되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한 번 시작한 궁궐 답사는 불과 3일만에 조선의 5대 궁궐을 모두 둘러보게 만들었다. 그 때가 한창 봄의 햇살이 내리쬐던 때였는데, 얼굴이 햇볕에 검게 그을리는 것도 모르고 그저 신나서 돌아다니던 모습을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다.

 궁궐을 찾아다닐 때마다 작은 '똑딱이 카메라(자동식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자료를 모았다. 언젠가는 자료를 정리해서 멋진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기도 했었는데,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어느 새 반 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 게으름을 누구에게 탓하겠냐만은 그래도 이제라도 정리해서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 자체가 기특하다고 내 자신을 위로해본다.

 이제 창고에 쌓아놓은 자료의 보따리를 풀어 보려고 한다. 솔직히 얼마나 자주, 또 얼마나 오래 쓸 수 있을지는 지금도 장담하지 못한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인데 중간에 그만 둔다고 한들 그 누가 무어라 할 것이며 또 잘 한다고 한들 그 누가 칭찬할 것이냐만은, 내가 모아둔 자료를 정리하며 지식의 폭을 한층 넓힐 수 있고, 또 그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2007.09.23. 처음 쓰고, 2008.09.10. 고쳐 쓰다.


(예전 블로그에 글 연재 시작할 때 서문으로 써두었던 글인데, 그동안 미루고 미루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에 글을 옮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