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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전시회/문화재/문화재 답사

영조, 아들에게 자결을 명하다 : 창경궁 문정전

 조선에서 가장 장수한 임금 영조.
 국사 시간에 영조에 대해서 배우면, 반드시 배우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와 그의 손자인 정조 두 시대에 걸쳐서 시행한 '탕평책'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조 38년 윤5월 13일, 영조는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말을 자신에 아들에게 전한다. 바로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한 것이다.

 당시 사도세자는 형인 효장세자의 요절에 의해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영조의 정비에게서 난 아들이 아니었다.
 조선의 왕들 중에서 맏아들로 승계 받아서 제대로 왕의 책무를 다한 왕들이 많지 않다고 하지만, 영조만큼 그 정통성이 확립 안 된 왕도 드물다. 그만큼 왕위 계승에 있어서 엄청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당쟁에 의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권력 대립에 의한 희생양일까. 어쨌든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이상하리만큼 미워했다.


사도세자, 폐서인이 되어 뒤주 속에서 죽다

 그렇게 하루하루 대립의 나날이 계속되다가 바로 운명의 그 날 영조는 자신의 아들에게 자살하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차마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할 수 없는 말을 내뱉은 그 장소가 바로 창경궁 문정전이다.

창경궁 문정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영조가 자결을 명한 장소는 '휘령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휘령전이라는 곳은 존재하지 않고, 그보다 앞선 실록의 기록을 보면, 영조 34년에 문정전을 정성왕후의 혼전인 휘령전으로 하라는 명이 보인다. 이 기록을 볼 때, 당시 휘령전은 지금의 문정전이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당시 기록을 토대로 보면, 사도세자는 자결을 명한 아버지를 향하여 개과천선할 것을 다짐하며 용서를 구하지만, 영조는 오히려 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둬버린 후, 먹을 것 일체를 금할 것을 명한다. 한 마디로 굶겨 죽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고, 실제로 사도세자는 8일 뒤에 뒤주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자결을 명 받은 사도세자가 엎드려 있었던 문정전 앞 마당



가족조차 등을 돌린 외로웠던 세자

 아무리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서슴치 않을 수 있는 왕의 자리라지만, 정말 매정한 아버지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왕에게 세자의 잘못을 고변한 이가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라는 사실이다. 또한 당시 사도세자의 반대편에 서서 여론을 주도하던 이 중 한 명이 그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헌경왕후)의 아버지인 홍봉한이었다는 것을 보면, 사도세자의 주변에는 그의 편을 들어줄 강력한 응원군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마디로 강력한 영조의 왕권 앞에서 모두가 알아서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을 보면, 사도세자의 모습이 광인으로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사도세자는 아내마저도 등을 돌린 불운아였는지 모른다. 오로지 그의 아들인 정조만이 그에 대한 효심을 다했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정조 관련된 기록을 다른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이런 슬픈 사건을 간직하고 있는 문정전은 1915년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허물어졌다가 1986년에야 원래 자리에 복원이 되었다. 그나마도 2006년에 방화 사건으로 인해 잿더미로 변할뻔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당시 주변에 있던 관광객들에 의해 빠르게 진화되어 큰 불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문정전은 물론이고, 바로 뒤에 있는 국보 226호 명정전까지 불길 속으로 사라질뻔했던 아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