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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전시회/문화재/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기자

재미있는 돋보기 :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 : 우암 송시열

오늘 재미있는 돋보기를 통해서 만나 볼 유물은 한 점의 초상화입니다.

조선 후기 성리학을 이끌어간 대 유학자.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론'의 영수로서 왕권에도 맞설 수 있었던 정치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천번 가까이 올랐으며,
그가 죽은 후, 노론 집권기에는 그를 배향한 서원이 전국에 44개나 존재했을 정도로 유학자로부터 추앙을 받았던 인물.

바로 '우암 송시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북벌을 강력히 주장하던 '효종'과 함께 단 둘이 독대를 했던 인물이기도 하고,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 논쟁을 벌여, 정권을 잡기도 했던 역사속의 인물, 송시열의 초상화를 만나 보시죠.


예송논쟁으로 왕에게 맞서다!

효종과 함께 북벌의 뜻을 함께했던 송시열은 효종 사후에 벌어진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대표가 되어 '남인'과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효종은 인조의 첫 째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인조의 장남이었던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독살설로 일컬어지는 의문의 죽음으로 결국 왕위에도 못 오른 채 짧은 생애를 마치고 맙니다.

따라서 차남이었던 '봉림대군'이 후에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효종'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효종'이 죽자 그의 계모였던 '자의대비'의 상복입는 기간이 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었습니다.

논쟁의 요점은 '효종'을 장남으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왕이 되었으니 장남으로 인정해서 자의대비가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남인들의 주장에 맞서서,
송시열은, 효종이 왕이 되었지만 본래 차남이므로 종법에 따라서 자의대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는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1년간 상복을 입기로 결정되면서 1차 예송 논쟁에서 서인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게 됩니다.
(사실 여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만,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어찌보면, 종법을 들고 나와서 유교적 전통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이면에는 남인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왕권보다 강력한 신권정치를 펼치고자 하는 의도가 감쳐줘 있었던 것입니다.




유학자로서의 기품을 간직한 초상화

그의 초상화를 보면, 깐깐한 유학자로서 왕에게도 서슴없이 대했을 것 같은 기품이 서려 있습니다.

당시 유학자들이 입던 '창의'를 걸치고 머리에는 검은색 건을 쓰고 있으며,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손까지 용모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통해 유학자로서의 기품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흰 수염과 주름으로 나이가 든 노인이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짙은 눈썹과 매서운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여간 깐깐해 보이지 않습니다.

고집 있어 보이는 얼굴에 더불어 두둑한 풍채를 갖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쉽사리 대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마치, 나이는 많이 들었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령하시는 무서운 교장 선생님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망설임 없이 왕에게 간언했던 그의 성격이 초상화 속에 그대로 투영된 것 같습니다.


사약을 세 그릇이나 먹은 사람

송시열은 많은 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결국 당쟁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게 됩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위대한 유학자로 일컬어지던 그의 최후를 극적으로 꾸며주기 위한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원래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를 갔다가 조사를 받기 위해 압송되던 중에 급하게 '사사(사약으로 죽임)'가 결정되어 정읍에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합니다.

보통 드라마에서 보면, 사약을 받으면 잠시 뒤에 입으로 피를 토하고 곧바로 쓰러져 죽곤 하는데요.
사실 사약이라는 것이 굉장히 고통스럽게 죽이는 방법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드라마 속에서의 모습과 달리 대부분이 사약을 먹고 바로 죽지 않았는데, 이유는 약효가 퍼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이는 사약을 들이킨 후에 따끈한 온돌방으로 들어가서 온몸에 약효가 퍼질 때까지 방바닥에 누워있다가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송시열의 경우에는 어린 시절 죽을 병에 걸렸다가 치료를 할 때, 강력한 독을 치료용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독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약의 약효가 잘 듣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사약을 세 그릇이나 먹고 나서야 약효가 퍼지기 시작해서 죽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사약을 먹고도 약효가 없자, 입 천장을 바늘로 찌른 뒤에 사약을 먹여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반면, 또 다른 이야기로는 그가 죽음 앞에서 '효종'의 어찰을 핑계로 목숨을 구걸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송시열의 초상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오늘 재미있는 돋보기의 주인공인 송시열의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 2층 미술관에 위치한 회화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변에는 우리 조상들의 다른 초상화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으며, 주기적으로 교체되고 있답니다.

조상들의 얼굴을 보면서, 초상화 속의 인물의 삶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 전시 유물은 예고 없이 변동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명예기자 이귀덕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박물관은 살아 있다.]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