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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전시회/문화재/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기자

한국 박물관 100주년 특별전 (3) 몽유도원도

2009. 10. 2.
한국 박물관의 역사를 한 자리에
한국 박물관 개관100주년 특별전
(3) 특별 공개 유물 : 몽유도원도


☞ 2편에 이어서...

  13년만에 고국땅을 찾아 온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꼭 보고자 마음 먹으며 야간 개장 시간을 이용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그러나 폐관시간이 다 되도록 줄어들지 않는 관람 줄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며 안타까움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다시금 '몽유도원도'를 보러 꼭 오리라 다짐을 하고 박물관을 나오게 되는데...



 유난히도 짧은 추석 연휴, 매년 추석이면 연휴 중의 하루는 어디론가 답사를 떠났었다. 조선의 왕릉들을 찾아가기도 하고, 궁궐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유서 깊은 사찰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사색에 잠겨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항상 행선지를 정하는 데에 있어서 나름대로 적지 않은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러다 보니 막상 떠나는 당일 아침에서야 급하게 행선지가 정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올해 추석 연휴에도 어디론가 찾아다닐 작정이었는데, 이번에는 행선지를 비교적 쉽게 정할 수 있었다.

 바로 국립중앙박물관! 이틀 전에 '몽유도원도'를 바로 코 앞에 두고서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추석 연휴를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잠깐! : '몽유도원도'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무릉도원을 노닐 던 꿈을 화가인 안견에게 말하자 안견이 단 3일만에 그려서 안평대군에게 바친 그림이다. 이에 안평대군이 직접 '몽유도원도'라는 제목과 함께 7언절구의 시를 쓰고, 안평대군과 함께 어울리던 신숙주,성삼문, 김종서, 박팽년 등의 문사 20여 명이 그림을 칭찬하는 글과 시를 지어 완성된 작품이다.

 당시 시와 글을 지은 이들이 모두 친필로 글을 적어 두어 예술적 가치 외에도 역사적인 가치도 상당한 작품이며, 이른바 '시서화(詩書畵)'의 삼절(三絶)이 어우러진 조선 전기의 보물급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연휴 첫 날, 박물관 개관 시간인 9시에 맞춰서 도착하기 위해 일찌감치 일어나서 아침을 해결하고 부랴부랴 박물관을 향해 전철에 몸을 실었다. 생각보다 조금 늦어져서 9시 20분에 도착했지만 '아침 시간인데 사람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어?'라는 생각을 하며 전시관을 향해 걸어 가는데...

 아뿔싸, 이번에도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개관한지 30분도 안 된 시각,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한 줄은 이미 전시관 앞 마당을 가득 채웠다.



 기획 전시실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줄은 이미 전시관 마당을 한바퀴 감은 상태였다. 급하게 안내데스크로 가서 프레스카드를 발급 받으며 물어보았다.

 "언제부터 줄이 저렇게 길었어요?"
 "박물관 직원들 출근하는 시간에 이미 매표줄이 저렇게 늘어서 있더라구요."

 헉! 이번에도 안일한 생각으로 박물관을 찾은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유럽 여행 다큐멘터리를 보면, 루브르 미술관이나 대영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건물 바깥으로 몇 바퀴씩 기다리는 줄을 보며, 우리 나라의 박물관도 언제쯤이면 저런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부러워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의 박물관도 조금씩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줄 서 있는 사람들 구경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어느 새 11시 반, 드디어 몽유도원도가 전시된 전시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몽유도원도의 실물을 볼 수 있게 된다.

알아 둘 정보 :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어디에 있는가?

 이번에 13년 만에 고국을 찾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어디에서 소장하고 있을까?

 바로 일본의 '텐리(天理) 도서관'에서 소장 중인데, 1950년 대에 '텐리 도서관'에서 구입하게 된 이후의 이력만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으며, 그 이전에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890년 대에 이미 일본에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텐리 도서관'으로 넘어가기 전 1949년에 일본과 국내에서 활동하던 '장석구'라는 골동상에 의해 국내에서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골동상이 부른 가격은 국내 여건 상 도저히 구매할 수 없는 금액이었으며, 얼마 후 몽유도원도는 영영 일본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몽유도원도'를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 긴 기다림 끝에 몽유도원도와의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도 짧았다.



 무려 두시간 반을 기다려서 드디어 '몽유도원도' 앞에 섰다. 너무나도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1인당 관람 시간을 30초 이내로 제한을 하고 있었다. 너무 안타까웠다. 우리의 문화재를 감상하는 데 이렇게 짧은 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다니, 시서화(詩書畵) 삼절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몽유도원도'를 보는 데 고작 30초라니...

 분명 우리의 문화재인데, 외국으로 반출되었다가 이렇게 고국 나들이 한 번 할 때마다 사람들을 몰릴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이 조금 서글퍼졌다. 수 많은 외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문화재들이 외국으로 나가 있을 것이며, 그런 문화재들이 이렇게 한 번씩 찾아올 때에야 비로소 우리 문화재를 우리 땅에서 볼 수 있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애초부터 우리 곁에 있었더라면, 시간을 두고두고 곱씹어 보면서 차근차근 보았을 텐데, 그리고 옛 선인들이 지녔을 풍류 기질 한 자락이라도 배워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미처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안평대군이 친필로 쓴 '몽유도원도' 글씨와 그 왼쪽으로 붉은 글씨의 발문이 보인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중 일부


안견의 '몽유도원도' 중 일부


몽유도원도의 찬문.



 프레스 카드를 발급 받고 사진을 찍었지만, 2시간 가까이 줄을 서면서 기다리다 보니, 나로 인해서 뒷 사람들에게 방해를 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되 다른 관람객처럼 나도 30초 이내에서 관람하면서 찍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얻은 사진들이 기대 이하였지만, 사진으로는 남길 수 없는 감흥을 마음 속 깊이 간직했다.

 두 시간 반의 기다림, 그리고 '몽유도원도'와의 짧았던 만남의 시간을 뒤로 한 채, 그리고 여전히 많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전시관을 나섰다. 전시관을 나서며 언젠가는 '몽유도원도'를 마음껏 볼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랐다. 비단 '몽유도원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재가 모두 우리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 날을 살짝 꿈꾸어 보았다.




(4편에 계속)

(4)편에서는 한국 박물관 초창기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관람 안내!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이번 10월 7일(수요일)까지만 전시가 된다. 글 쓴 현재 시점에서 이틀 밖에 전시기간이 남지 않았는데, 꼭 보고 싶다면 아침 개장 시간 9시에 맞춰서 가거나, 수요일 마지막 전시일에 이루어지는 야간 개장을 이용하면 다른 시간보다 수월하게 관람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