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아들에게 자결을 명하다!
오늘 재미있는 돋보기 시간에는 유물을 소개하기에 앞서 역사적인 사건을 간단히 먼저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조선 제21대 왕이었던 '영조'는 조선 역사상 가장 장수했던 임금 중의 한 명입니다.
재위 기간도 무려 50년이 넘으니,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조선 왕조 500년 중에서 10분의 1을 혼자서 다스린 셈이지요.
영조 재위시절은 흔히 '탕평'으로 기억되는 만큼 정치적으로도 안정되고, 백성들도 태평성대를 누리는 이른 바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평성대를 이끈 임근인 영조에게는 유난히도 가족사적인 문제가 많았는데요.
우선은 조선 최초의 무수리 출신 궁녀의 아들로 알려진 그의 출생 신분부터, 형인 '경종'에 대한 독살 의혹도 받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큰 사건은 바로 자신의 친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사건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창경궁의 문정전.
사실 영조 시절에 '탕평책'을 시행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영조는 '노론' 세력에 힘입어 즉위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당파싸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소론' 세력이 지지하는 아들, 사도세자와의 마찰이 없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부자지간이라고는 하지만, 왕위를 놓고서는 형제간의 살육도 마다않는 것은 이미 조선 초의 '왕자의 난'이나 '단종 폐위 사건'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부자간의 마찰은 정쟁과 맞물려서 점차 확대되어 갔고, 결국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령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강제로 쌀 뒤주에 가두어서 죽이고 맙니다.
일반적인 사대부 집안, 아니 하물며 천민들의 집안에서도 있을 수 없었을 일이 궁중에서 벌어지고 만 것이지요.
애닳는 부정의 표현일까? 아니면 비겁한 변명일까? : 사도세자 묘지명
오늘 재미있는 돋보기 시간에 소개할 유물은 앞서 소개한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유물입니다.
바로 '사도세자 묘지명'인데요.
묘지명이라는 것은 무덤 주인의 삶의 행적을 기록하여 무덤 입구에 함께 묻는 돌을 말합니다.
오늘 살펴볼 사도세자의 묘지명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묘지명에 새겨진 글을 '영조'가 친히 지었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직접 죽으라고 명령한 아들의 묘지명을 친히 짓는다는 것이 어찌 보면 뻔뻔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청화백자로 된 사도세자의 묘지명은 총 다섯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묘지명을 보면, 영조의 심정이 적혀 있는데요.
사도세자를 향해서 어찌 잘못 행동하여 늙은 아버지로 하여금 몹쓸짓을 하도록 하였느냐며 통탄하는 내용과 함께 자신의 변명을 늘어 놓고 있습니다.
아무리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라고는 하지만, 자식을 죽인 일은 분명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부도덕한 행위에 대하여 영조는 사회적인 변명 행위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이 죽인 아들의 묘지명을 직접 쓰는 아비의 마음은 아무리 왕일지라도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영조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문을 묘지명에 적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명조선국??
묘지명의 첫 장에는 영조가 친히 내린 시호 '사도세자'가 적혀 있습니다. (푸른 선 참조)
여기서 '사도(思悼)'라는 말은 '생각하고 슬퍼한다'라는 뜻인데요.
영조가 친히 내린 시호인만큼, 비록 자식을 죽이긴 했지만, 왕정에 있어서 왕위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하는 왕으로서 어쩔 수 없이 자식을 죽여야 했던 아비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묘지명을 보면 또 하나의 흥미있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바로 '사도세자' 이름 바로 앞에 적힌 '유명조선국'이라는 구절입니다. (붉은 선 참조)
말 그대로 풀이하면 '밝음이 있는 조선'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요. 아무래도 중국의 '명나라'와의 연관성을 지우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조선 후기 비석에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간혹 '유명조선'이라고만 나오기도 하는데, 모두가 비석의 주인공의 관직과 성명 앞에 붙어서 나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설이 있는데요. 어떤 설이 맞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
첫 번째 설은 앞서 간단히 언급했듯이 '밝음이 있는 조선' 즉, 광명이 깃들어 있는 나라 조선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설은 명나라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설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명나라에 속해 있는 조선"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명나라가 있으므로 조선이 있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모두가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간주해서 표현한 글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인데요. 이렇게 해석하다보니 당시 조선 사람들 스스로가 중국의 속국임을 자처했다는 표현처럼 보여서 썩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세 번째 설은 청나라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유명조선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시기가 청나라가 명나라를 몰아내고 중국을 차지한 이후에 나타나기 때문인데요.
이런 견해를 가진 자들은 "명나라의 뜻이 조선에 있다"라고 보통 해석하곤 합니다.
즉,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망했지만 그 뜻은 조선에 이어져서 내려오고 있고, 조선은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를 섬길 수 없다'라는 자주적인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세 가지 설 모두 그럴싸해서 어느 것이 맞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유독 조선 후기부터 비석에 이런 구절이 자주 등장했다는 사실은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장조
영조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세자로 책봉되었던 '사도세자'
그러나 결국엔 아버지와의 대립을 피할 수 없었고, 끝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던 비운의 세자.
앞서 말했듯, 그는 죽고 난 뒤에 아버지인 영조에 의해서 '사도세자'라는 시호를 부여 받습니다.
이후에 자신의 아들이었던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묘도 세자의 '묘'에서 '원'으로 격상되게 됩니다.
그런 그가 왕, 아니 황제의 지위를 사후에 부여받게 되는데요.
바로 그의 후손 중의 한 명이 대한제국 최초의 황제인 '고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조선 말기의 왕계는 모두가 사도세자의 가계에서 이어받게 됩니다.
각각 정조의 아들과 증손자인 순조, 헌종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된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중 한 명인 '은언군'의 손자였고,
다시 그 뒤를 이어 왕이된 '고종'은 사도세자의 또 다른 서자인 '은신군'의 증손자랍니다.
물론 조선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은 고종의 아들이었구요.
이렇듯이 조선의 마지막 왕들은 모두 사도세자의 후손들을 통해서 왕위를 이어가게 됩니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 선조들에 대한 추숭 사업을 하게 되는데, 고종의 고조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장조'라는 이름으로 황제로 추존하게 된 것입니다.
추존왕이지만, 대한제국 황제 중 첫번째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비록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비참했었지만, 그의 사후에나마 '황제'라는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으니, 억울한 죽음에 대한 작은 보상이나마 받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사도세자 묘지석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오늘 소개한 유물 '사도세자 묘지명'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에 위치한 역사관 117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주변에는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유물들을 함께 감상할 수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
* 전시 유물은 예고 없이 변동될 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블로그명예기자 이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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