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현재 조선 시대의 궁궐 5곳이 남아 있다.
조선의 첫 궁궐이자 임진왜란 전까지 정궁으로 사용하던 경복궁, 이궁으로 설립되어 임진왜란 이후에 정궁의 기능을 담당하던 창덕궁,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리던 창경궁,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궐로 불리던 경희궁, 대한 제국시절 일제에 의해 '덕수궁'이라는 바뀌게 된 경운궁. 이렇게 다섯 곳을 가르켜서 5대 궁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간혹 5대 궁궐 중의 하나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운현궁'인데, 이름 때문에 궁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사실 운현궁은 궁궐이 아닌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 즉 쉽게 말해서 흥선대원군이 살던 일반 가정집이다. 물론 운현'궁'이라는 이름 답게 평범한 사대부들이 살던 집과는 그 역할이 사뭇 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운현궁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살던 곳으로, 이곳에서 고종이 태어났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졌으며,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납치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운현궁에는 조선 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운현궁은 규모가 다소 축소되어 일부 주요 건물만 남아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기거하던 시절에는 엄청난 위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대원군의 섭정이 절정에 달하던 고종 즉위 후부터 10년까지의 기간 동안 운현궁은 말 그대로 '궁'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사가가 '운현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863년 12월 9일 고종의 아버지였던 흥선군에게 '대원군'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교지가 내려진 이후부터라고 한다.
본래 이 곳은 천문을 관측하던 관상감이 있던 자리인데, 관상감의 옛 이름이 '서운관'이고, 바로 서운관이 위치한 곳 앞에 있는 고개 이름이 '운현'이었다. 이 '운현'이라는 이름을 따서 '운현궁'이라는 칭호가 붙여졌다고 한다. 특히 철종시절, 이 곳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민요가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후에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지어진 이야기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곳 '운현궁'터가 궁궐 못지 않은 명당터임에는 틀림이 없었던 모양이다.
특히 고종3년(1866년) 3월 21일에 이 곳 운현궁의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졌다. 왕이 궁궐이 아닌 사가에서 가례를 올린다는 것 자체가 의아한 일인데, 이를 통해서 당시 대원군의 위세와 이 곳 운현궁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운현궁은 예전의 모습에 비해 상당 부분 축소된 규모인데,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직후부터 운현궁은 조금씩 그 위상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혼란기를 거친 뒤, 소유권 분쟁 등에 휘말리기도 하였고, 현재는 노락당, 노안당 등의 주요 건물 일부만 남아 있어 운현궁을 찾는 이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고 있다.
조선 말의 역사와 함께한 운현궁, 주말에 종로를 찾을 일이 있다면 한 번쯤 들러봄 직한 문화유산이 아닐까 싶다. 특히 주말에 다양한 문화행사가 진행되기도 하는데, 일부 행사의 경우 무료 입장이 가능하게끔 연계되어 진행되기도 하니, 문화행사도 즐기고, 운현궁도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조선의 첫 궁궐이자 임진왜란 전까지 정궁으로 사용하던 경복궁, 이궁으로 설립되어 임진왜란 이후에 정궁의 기능을 담당하던 창덕궁,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리던 창경궁,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궐로 불리던 경희궁, 대한 제국시절 일제에 의해 '덕수궁'이라는 바뀌게 된 경운궁. 이렇게 다섯 곳을 가르켜서 5대 궁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간혹 5대 궁궐 중의 하나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운현궁'인데, 이름 때문에 궁궐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사실 운현궁은 궁궐이 아닌 흥선대원군의 사가(私家), 즉 쉽게 말해서 흥선대원군이 살던 일반 가정집이다. 물론 운현'궁'이라는 이름 답게 평범한 사대부들이 살던 집과는 그 역할이 사뭇 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운현궁 입구
운현궁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살던 곳으로, 이곳에서 고종이 태어났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졌으며,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납치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운현궁에는 조선 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했던 '노안당'
현재의 운현궁은 규모가 다소 축소되어 일부 주요 건물만 남아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기거하던 시절에는 엄청난 위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대원군의 섭정이 절정에 달하던 고종 즉위 후부터 10년까지의 기간 동안 운현궁은 말 그대로 '궁'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운현궁'의 축소 모형
흥선대원군의 사가가 '운현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863년 12월 9일 고종의 아버지였던 흥선군에게 '대원군'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교지가 내려진 이후부터라고 한다.
본래 이 곳은 천문을 관측하던 관상감이 있던 자리인데, 관상감의 옛 이름이 '서운관'이고, 바로 서운관이 위치한 곳 앞에 있는 고개 이름이 '운현'이었다. 이 '운현'이라는 이름을 따서 '운현궁'이라는 칭호가 붙여졌다고 한다. 특히 철종시절, 이 곳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민요가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후에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지어진 이야기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곳 '운현궁'터가 궁궐 못지 않은 명당터임에는 틀림이 없었던 모양이다.
특히 고종3년(1866년) 3월 21일에 이 곳 운현궁의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졌다. 왕이 궁궐이 아닌 사가에서 가례를 올린다는 것 자체가 의아한 일인데, 이를 통해서 당시 대원군의 위세와 이 곳 운현궁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뤄진, 운현궁의 안채 '노락당'
지금의 운현궁은 예전의 모습에 비해 상당 부분 축소된 규모인데, 흥선대원군이 하야한 직후부터 운현궁은 조금씩 그 위상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혼란기를 거친 뒤, 소유권 분쟁 등에 휘말리기도 하였고, 현재는 노락당, 노안당 등의 주요 건물 일부만 남아 있어 운현궁을 찾는 이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초상
조선 말의 역사와 함께한 운현궁, 주말에 종로를 찾을 일이 있다면 한 번쯤 들러봄 직한 문화유산이 아닐까 싶다. 특히 주말에 다양한 문화행사가 진행되기도 하는데, 일부 행사의 경우 무료 입장이 가능하게끔 연계되어 진행되기도 하니, 문화행사도 즐기고, 운현궁도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운현궁 입구를 지키고 서있는 아름드리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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